한 권의 수첩이 회사를 살리다 2차 대전 때였다. 런던의 노먼 앤 힐 컴퍼니는 자신들이 독일 공군의 표적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들이 만드는 것"이라고는 구성이 알차고 크기도 작은 일정 정리 수첩뿐이었다. 그것이 독일군에게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그러나 1940년 12월, 회사는 날벼락을 맞았다. 표적을 벗어난 독일 폭탄 하나가 건물에 명중하는 바람에 회사와 회사의 기록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폭격이 끝난 후 앞날은 깜깜해보였다. 간부들이 고객과 공급처 명단을 다시 만들자면 몇 달은 걸릴 것 같았다. 그때 그레이스 스커가 나타난 것이다. 건물의 잔해를 앞에 두고 동료들이 실의에 빠져 있던 순간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수첩을 흔들고 있었다. 거기에는 회사가 당장이라도 사업을 다시 시..
1985년, 그러니까 차고에서 시제품이 태어난 지 10년만에 회사직원들은 3명에서 80명으로 늘어났다. 노르딕트랙은 두 가지 모델을 계속 제작했다. 하나는 가정용 표준 모델이었고, 다른 하나는 밑바닥이 더 크고 팔 단련을 위한 저항 장치도 달린 전문가용이었다. 이듬해, 에드 폴스는 자신이 더 큰 업체와 겨룰 만한 자본도 전문지식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2천4백만 달러를 받고 회사를 CML 그룹에 매각했다. 노르딕트랙은 CML의 새로운 자본이 유입되면서 날개 돋친 듯 성장했다. 1990년까지 2개에 불과했던 모델 가짓수도, 상체의 힘을 키워주는 1천2백 달러짜리 파워 의자를 포함하여 16가지로 늘어났다. 그것 말고도 노르딕 플렉스골드(근력 측정기계), 피트워크(밟아서 돌리는 바퀴), 쉬..
에드 폴스는 노르딕트랙의 성격을 전문적인 크로스컨트리 훈련장비로만 국한시키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전신 건강을 위한 운동기구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 회사는 갑작스레 높아진 건강과 운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덕을 톡톡히 봤다. 의사들은 덜 격렬한 운동이 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르딕트랙에 만족한 소비자들은 유산소 운동이건 무산소 운동이건 모두 효과적이라고 칭찬을 했다. 처음으로 노르딕트랙을 추천하고 나선 사람 중 하나는 그의 딸이었다. 그녀는 두 차례나 전미 대학 크로스컨트리 대회를 석권한 베테랑이었다. 좀 지나서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빌 코흐까지 노르딕트랙을 추천하고 나선 덕분에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게된다. 노르딕트랙은 전국의 헬스 클럽에서 선풍적인 인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아이디어 1975년, 에드 폴스는 미네소타의 차가운 겨울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크로스컨트리 하기엔 딱 좋은 밤이군." 그는 주말에 있을 경기를 위해 얼음 같은 빗발과 끔찍한 진창 속에서도 끝까지 훈련해보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쓸쓸한 밤을 헤쳐나가다보니 자신이 왜 그렇게 괴로운 시련을 참아내며 훈련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희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실내에서 크로스컨트리를 할 수는 없을까? 그는 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실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작업을 하다보니 그게 쉽지 않았다. 제품은 고정되어 있어도 몸은 앞으로 가는 동작을 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했던 것이다. 폴스는 수많은 실패 끝에 격렬한 야외 운동을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기구를 개발하여 운동기구 업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