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아이디어 1975년, 에드 폴스는 미네소타의 차가운 겨울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크로스컨트리 하기엔 딱 좋은 밤이군." 그는 주말에 있을 경기를 위해 얼음 같은 빗발과 끔찍한 진창 속에서도 끝까지 훈련해보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쓸쓸한 밤을 헤쳐나가다보니 자신이 왜 그렇게 괴로운 시련을 참아내며 훈련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희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실내에서 크로스컨트리를 할 수는 없을까? 그는 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실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작업을 하다보니 그게 쉽지 않았다. 제품은 고정되어 있어도 몸은 앞으로 가는 동작을 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했던 것이다. 폴스는 수많은 실패 끝에 격렬한 야외 운동을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기구를 개발하여 운동기구 업계..
실리퍼티가 발명된 것은 간접적이기는 해도 전쟁 때문이었다. 1차대전 중 부족한 고무를 대신할 물질을 개발하다가 만들어진 것이 실리퍼티니까 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것이 거의 사라질 뻔했던것도 전쟁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전쟁 수행을 위해 많은 원자재에 대하여 제한 조치를 내렸다. 거기에 실리콘도 포함되었다. 당시, 호지슨이 가진 실리콘으로는 평상시라면 일주일도버티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동안은 주문량 대부분을 잔고로 돌리면서 실리퍼티를 이리저리 쪼개서 배급해야만 했다. 1952년, 다행히 정부는 실리콘에 대한 제한 조치를 해제했고 호지슨은 사업으로 복귀했다. 판매는 그 다음 3년 동안 안정적인 비율로계속 증가했다. 1955년까지 주된 구매층은 6세부터 12세까지의 아이들이었다. 1957..
뉴욕에서의 본 경기를 위해 촌구석인 뉴 헤이븐에서 먼저 시범경기를 가져볼 생각을 한 사람은 호지슨 뿐이었을 것이다. 1950년, 피터 호지슨은 이미 1만2천 달러의 빚을 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GE로부터 소량의 실리퍼티라도 사볼 요량으로 근근히 147달러를 마련했다. 실리퍼티를 팔기 위한 호지슨의 노력은 극진함 그 자체였다. 그는 실리퍼티라는 이름을 찾기 위해 무려 14개나 되는 이름을 버려야했다. 또 실리퍼티 1온스에 계란 모양의 플라스틱 껍데기를 씌우고 값도 이전의 절반인 1달러로 낮췄다. 하지만 맨해튼 국제박람회에 온 바이어들은, 10센트면 찰흙으로 놀 수 있는 아이들이 실리퍼티에다 뭐하러 1달러나 쓰겠냐는 반응을 보였다. 파산지경에 몰린 호지슨에게 남은 것이라곤 달라스와 맨해튼의 판매망 두 곳..
방향을 알 수 없는 행운의 바운드 1943년의 어느 운명적인 날, 코네티컷 주의 뉴 헤이븐에 있는 GE사의 실험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라이트는 고향 음식을 먹는꿈을 꾸고 있었다. 고무 대체물질을 연구하는 도중, 그는 우연히 비커에다 붕산과 실리콘 오일을 섞어보았다. 뭔가 끈끈한 물질이 만들어졌다. 그는 잠시 동안 뚫어져라 새로운 물질을 쳐다보다가 귀신에홀리기라도 한 듯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 튀어오른다.'1950년 어떤 마케팅 전문가가 이 기묘한 물질에 딱 맞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이름, 실리퍼티(얌체볼)! 독특한 신물질 GE사는 라이트의 발명품을 무엇에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 세계의 기술자들에게 피드백을 요구하며 작은 샘플을보냈다. 반응은 이랬다. "이것 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