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퍼티가 발명된 것은 간접적이기는 해도 전쟁 때문이었다. 1차대전 중 부족한 고무를 대신할 물질을 개발하다가 만들어진 것이 실리퍼티니까 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것이 거의 사라질 뻔했던것도 전쟁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전쟁 수행을 위해 많은 원자재에 대하여 제한 조치를 내렸다. 거기에 실리콘도 포함되었다. 당시, 호지슨이 가진 실리콘으로는 평상시라면 일주일도버티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동안은 주문량 대부분을 잔고로 돌리면서 실리퍼티를 이리저리 쪼개서 배급해야만 했다. 1952년, 다행히 정부는 실리콘에 대한 제한 조치를 해제했고 호지슨은 사업으로 복귀했다. 판매는 그 다음 3년 동안 안정적인 비율로계속 증가했다. 1955년까지 주된 구매층은 6세부터 12세까지의 아이들이었다. 1957..
뉴욕에서의 본 경기를 위해 촌구석인 뉴 헤이븐에서 먼저 시범경기를 가져볼 생각을 한 사람은 호지슨 뿐이었을 것이다. 1950년, 피터 호지슨은 이미 1만2천 달러의 빚을 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GE로부터 소량의 실리퍼티라도 사볼 요량으로 근근히 147달러를 마련했다. 실리퍼티를 팔기 위한 호지슨의 노력은 극진함 그 자체였다. 그는 실리퍼티라는 이름을 찾기 위해 무려 14개나 되는 이름을 버려야했다. 또 실리퍼티 1온스에 계란 모양의 플라스틱 껍데기를 씌우고 값도 이전의 절반인 1달러로 낮췄다. 하지만 맨해튼 국제박람회에 온 바이어들은, 10센트면 찰흙으로 놀 수 있는 아이들이 실리퍼티에다 뭐하러 1달러나 쓰겠냐는 반응을 보였다. 파산지경에 몰린 호지슨에게 남은 것이라곤 달라스와 맨해튼의 판매망 두 곳..
방향을 알 수 없는 행운의 바운드 1943년의 어느 운명적인 날, 코네티컷 주의 뉴 헤이븐에 있는 GE사의 실험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라이트는 고향 음식을 먹는꿈을 꾸고 있었다. 고무 대체물질을 연구하는 도중, 그는 우연히 비커에다 붕산과 실리콘 오일을 섞어보았다. 뭔가 끈끈한 물질이 만들어졌다. 그는 잠시 동안 뚫어져라 새로운 물질을 쳐다보다가 귀신에홀리기라도 한 듯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 튀어오른다.'1950년 어떤 마케팅 전문가가 이 기묘한 물질에 딱 맞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이름, 실리퍼티(얌체볼)! 독특한 신물질 GE사는 라이트의 발명품을 무엇에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 세계의 기술자들에게 피드백을 요구하며 작은 샘플을보냈다. 반응은 이랬다. "이것 참 ..
체스브로우는 바세린을 거절한 의사와 약사들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첫 번째로 마차를 타고 뉴욕의 거리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샘플을 나눠주었다. 두 번째 방법은 거의 자해공갈단 수준이었다. 직접 상처를 내고 화상을 입어가면서 바세린의 효과를 입증해 보인 것이다. 무료 배포는 미국에서 처음 시도된 판매 전략이었다. 반응도 굉장해서, 사람들은 너나 없이 약사들에게 바세린을 달라고 했다. 또 영국의 유명한 의학 출판물 「란셋」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1878년, 바세린은 파리 박람회에 출품되어 뜨거운 관심 속에 히트를 쳤다. 곧 의료 전문가들이 바세린의 효능을 발견했고 의사들도 가벼운 화상이나 찰과상에는 바세린을 바르라고 환자들에게 권유했다. 그 외에도 바세린은 기침 감기에 바르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