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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퍼티가 발명된 것은 간접적이기는 해도 전쟁 때문이었다. 1차대전 중 부족한 고무를 대신할 물질을 개발하다가 만들어진 것이 실리퍼티니까 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것이 거의 사라질 뻔했던것도 전쟁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전쟁 수행을 위해 많은 원자재에 대하여 제한 조치를 내렸다. 거기에 실리콘도 포함되었다. 당시, 호지슨이 가진 실리콘으로는 평상시라면 일주일도버티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동안은 주문량 대부분을 잔고로 돌리면서 실리퍼티를 이리저리 쪼개서 배급해야만 했다.
1952년, 다행히 정부는 실리콘에 대한 제한 조치를 해제했고 호지슨은 사업으로 복귀했다. 판매는 그 다음 3년 동안 안정적인 비율로계속 증가했다. 1955년까지 주된 구매층은 6세부터 12세까지의 아이들이었다. 1957년, 판매량은 최고치인 7백만 개에 다달았다. 1961년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플라스틱 박람회에서도 실리퍼티는 가장인기 있는 전시품이 되었다. 결국 이 상품의 인기는 전유럽을 강타하기에 이른다.
아폴로 계획과 실리퍼티
아폴로 8호가 1968년 달로 여행했을 때, 우주비행사들은 특별히실리퍼티를 가져가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지루함을 덜고 가벼운 도구도 고정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호지슨은 그것을 기념하여 계란모양의 은제 용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퍼티는 장난감으로만 쓰인 게 아니었다. 많은 운동선수들은 악력(손으로 쥐는 힘)을 강화하기 위해 실리퍼티를 사용했다. 이런 방법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미식축구 선수 레이 배리의 강연으로 더유명해졌다. 퍼티는 타자기의 자판을 청소하고 플러그의 누전을 막는 데, 옷에서 실밥를 떼고 만화에서 색깔을 빼는 데도 쓰였다. 몇몇금연단체들은 실리퍼티가 또다시 흡연 욕구를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완벽한 촉각적 대용품이라고 칭찬했다.
1976년, 비니 앤드 스미스 사가 연간 판매량이 5백만 개로 하락한실리퍼티의 판매 및 상표에 대한 권리를 사들였다. 판매량 감소는브랜드에 "퍼티"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많은 경쟁사들 때문이었다.1980년 무렵, 실리퍼티의 판매는 2백만 개 이하로 떨어졌다.
1990년, 실리퍼티는 40주년을 맞이했다. 그것은 G.I. 조나 바비 인형, 슬링키보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그날 비니 앤드 스미스는 225kg짜리 대형 케이크와 함께 장난감 박람회에서 생일파티를 열었다. 1년 후인 1991년, 실리퍼티는 야광 제품으로 거듭났다. 최근에는 다시높아진 관심 덕분에 연간 6백만 개가 팔려나간다.
실리퍼티는 심지어 사전에도 나온다. 실리콘과 메틸 알콜을 원료로 만들어 낸 말랑한 물질, 그것에 대한 등록상표. 장난감으로 쓰인다. 그 물질은 늘어나고 조각으로 나뉘어지며 튀어오른다. 쉽게 모양을 만들 수도 있다."
피터 호지슨은 1976년에 사망했다. 그는 겉보기에는 쓸모없는 끈적한 물질을 얻어다가, 이름을 지어주고, 모든 위험을 감수하며 관매했다. 그는 실리퍼티 하나로만 거액을 벌어들여 1억 4천만 달러 상당의 유산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