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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의 본 경기를 위해 촌구석인 뉴 헤이븐에서 먼저 시범경기를 가져볼 생각을 한 사람은 호지슨 뿐이었을 것이다. 1950년, 피터 호지슨은 이미 1만2천 달러의 빚을 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GE로부터 소량의 실리퍼티라도 사볼 요량으로 근근히 147달러를 마련했다.
실리퍼티를 팔기 위한 호지슨의 노력은 극진함 그 자체였다. 그는 실리퍼티라는 이름을 찾기 위해 무려 14개나 되는 이름을 버려야했다. 또 실리퍼티 1온스에 계란 모양의 플라스틱 껍데기를 씌우고 값도 이전의 절반인 1달러로 낮췄다.
하지만 맨해튼 국제박람회에 온 바이어들은, 10센트면 찰흙으로 놀 수 있는 아이들이 실리퍼티에다 뭐하러 1달러나 쓰겠냐는 반응을 보였다. 파산지경에 몰린 호지슨에게 남은 것이라곤 달라스와 맨해튼의 판매망 두 곳 뿐이었다.
끈기는 행운을 부르고
1950년 8월, 잡지 「뉴요커』의 한 기고가가 맨해튼의 더블데이 서점에 들렀다. 그의 눈에 비친 서점 직원은 달걀처럼 생긴 물건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실리퍼티의 뉴욕판매점이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잡지의 도시의 명물」섹션에 실리퍼티에 관한 특집기사가 실렸다. 『뉴요커』는 실리퍼티가 "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독특한 상품이라며 두 페이지나 되는 지면을 할애했다. 인터뷰에는 호지슨의 말도 나왔다. “실리퍼티는 5분간의 노이로제 탈출입니다. 또 머리를 많이 쓰는 분들께도 인기지만, 피로에 지친 성인분들의 긴장감도 풀어줍니다."
기사가 나가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3주도 안돼서 25만 개가 넘는 주문이 밀려든 것이다. 생전 처음인 열렬한 관심 앞에 호지슨은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기사가 나가기 전, 그는 평균잡아 한 달에1만 개 정도를 팔았다. 그런데 기사가 나간 뒤에는 일주일에 25만 개까지 판매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기사에는 장난감으로 소개됐지만 최초의 소비자는 대부분 성인 남성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실리퍼티를 흔히 얌체볼로만 쓰곤 한다. 하지만 실리퍼티 물질은 매우 다양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 호지슨은 우리에게 익숙한 원형이 아닌 달걀 모양의 얌체볼을 만들어냈다. 럭비공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달걀 모양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실리퍼티의 본성에 더욱 적합하다고도 할 수 있다. 신경정신과 의사는실리퍼티가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적이라고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