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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 시장을 뚫다
1981년 어느 날 밤, 캐나다의 언론인 크리스 헤이니와 스콧 에벗은누가 상식이 더 많으냐에 대해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비록 재미로 벌인 대결이지만 그 범위는 과학이나 지리 등 학문에서 연예 상식까지 광범위했다. 그런데 이 선의의 대결 덕분에, 80년대라면 그어떤 미국인도 갖지 않고는 못 배겼을 말판 게임이 태어났다. 당시미국인들은 가족이나 친구와 트리비얼 퍼스트(Trivial Pursuit - 상식을찾아서)로 한판 붙어보고 싶어서 안달복달했던 것 같다.
체스나 체커, 마작을 빼면 1984년 이전에 미국인이 가장 즐기던 말판게임은 스크래블(빈칸 채우기)과 모노폴리 (부동산 게임)였다. 스크래블은 1931년 건축기사 알프레드 벗츠가, 모노폴리는 1934년 찰스대로우가 개발한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 모노폴리 이기는 법』이나 『스크래블 전략』같은 책이 나오면서 이들 게임에 대한 사람들의 전략이 다들 비슷비슷해져버렸다. 때문에 게임의 재미는 뚝 떨어졌고 인기도 점점 시들해졌다. 확실히, 성인용 말판 게임은 틈새가 크게 벌어진 시장이었다. 그 틈새를 채워준 것이 바로 트리비얼 퍼수트였다.
미국 시장 점령, 그 전초전
헤이니와 에벗은 우선, 말판, 문제 카드, 문제 항목, 게임에 필요한 말 등 게임의 기본적인 요소부터 확정했다. 그리고 여섯 개 항목(예술과 문학, 연예, 지리, 역사, 과학과 자연, 스포츠와 오락)을 정한 다음, 조그만 플라스틱 업체를 찾아가 각기 다른 색깔의 여섯 가지 놀이 기구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그들이 애초에 붙인 이름은 “트리비어 퍼스트(Trivia Pursuit)”였다. 그런데 헤이니의 부인이 "트리비얼 퍼스트(Trivial Pursuit)”가 듣기에 더 좋다고 해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헤이니와 에벗은 자신들에게 사업에 필요한 마케팅이나 홍보, 영업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헤이니의 형인존과 변호사 에드 워너를 영입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사업체의 이름을 혼 에벗 유한회사로 했다. 혼은 헤이니의 별명이었다. 처음 시작하는 사업이 다 그렇듯, 창업 자금은 각자의 저축을 털어서 마련했다. 시제품을 천 개쯤 만들 만한 자본을 확보하자 그들은 영업을 시작했다. 최초의 시제품은 캐나다의 온타리오에서 팔았는데 반응이 상당했다. 지역 주민들은 그 게임이 길고 긴 캐나다의 겨울을 보내기에 딱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성공에 고무되어 1982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장난감전시회에 제품을 내놓았다. 그들은 자신감에 차서 전시 부스를 빌리고 제품을 2만 세트나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바이어들의 주문은 고작 몇백 개에 그쳤다. 그들은 팔리지 않은 1만 9천 세트 앞에서 게임의 가능성을 잘못 판단한 것 같다며 낙담했다.
확실히, 회사는 미국 시장에 대한 유통망이 필요했다. 그들은 스크래블과 제오파디를 만드는 셀초우와 라이터에게 미국 유통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소파족들의 새로운 놀잇감
트리비얼 퍼수트가 미국에 진출한 후,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마치 양배추 인형이 나타났을 때처럼, 미국의 성인들은 반쯤은 미친 듯이 그 게임을 사들여댔다. 사실 별다른 판촉활동이나 광고도 없었는데, 미국인들은 사소한 것(트리비얼 퍼스트)에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1984년에 1천5백만 개의 트리비얼 퍼스트(Trivial Pursuit) 게임이 팔렸다. 이 게임은 화려한 데뷔 덕분에 오늘날까지 6천만 개가 팔려 나갔다. 트리비얼 퍼수트는 19개의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33개국에서 팔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두 집 당 하나 꼴로 트리비얼 퍼수트를 가지고 있다.
게임의 성공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사람들이 아는 것을 뽐내며 즐길 수 있었고, 지루하게 TV만 보던 전국의 소파족에게도 사람들과 식탁에서 어울리며 논다는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했기때문이다. 게임이 포괄하는 흥미거리나 지식의 범위는 대단히 넓었다. 6개 분야에 질문도 4천8백 개나 되다보니 누구라도 흥미롭게 풀거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따라서 드라마를 꽉 잡고 있는 엄마나 스포츠에 통달한 아빠라면 명문대 교수님과도 한판 붙어볼 수 있었다.
게임은 그것을 개발한 두 사람도 놀랄 만큼 환상적으로 성공했다.사실 그들은, 트리비얼 퍼스트가 TV 게임 「제오파디」보다는 쉬워서,대졸 학력 정도면 즐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헤이니는 “무슨 록스타라도 된 것 같아요" 라는 말로 얼떨떨한 심정을 표현했다.
트리비얼 퍼수트의 성공 이후
트리비얼 퍼수트는 캐나다에도 게임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다시일기 시작한 성인용 말판 게임 붐에서 한몫을 잡아보려는 몇몇 캐나다 사람들이 발더대쉬(Balderdash), 스크러플(Scruple), 마인드트랩(MindTrap), 픽셔너리(Pictionary) 등을 만들어냈다. 마인드트랩을 만든 토론토의 어떤 바텐더는 10만 개를 팔아서 떼돈을 벌었다. 반대로 서부 온타리오 대학의 두 친구가 개발한 올토콘(Orthocon) 게임은 겨우 5백 개밖에 팔리지 않았다.
1988년, 트리비얼 퍼수트가 엄청난 히트를 친 지 4년이 조금 못지나서였다. 혼 애벗 사는 1천2백만 달러에 대형 장난감 회사 헤스브로 계열의 파커 브라더스에 팔렸다. 이후 파커 브라더스는 청소년용, 가족용, 여행용, 그리고 1960년대 버전 등 게임의 종류와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혼 에벗을 설립하기 위해 각각 2천 달러씩을 투자했던 32명의 투자자들은 모두 부자가 되었다. 헤이니와 에벗은 물론 억만장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트리비얼 퍼수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