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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을 던져 효과를 입증하다

나는 손오공이다 2023. 4. 1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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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스브로우는 바세린을 거절한 의사와 약사들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첫 번째로 마차를 타고 뉴욕의 거리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샘플을 나눠주었다. 두 번째 방법은 거의 자해공갈단 수준이었다. 직접 상처를 내고 화상을 입어가면서 바세린의 효과를 입증해 보인 것이다.

    무료 배포는 미국에서 처음 시도된 판매 전략이었다. 반응도 굉장해서, 사람들은 너나 없이 약사들에게 바세린을 달라고 했다. 또 영국의 유명한 의학 출판물 「란셋」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1878년, 바세린은 파리 박람회에 출품되어 뜨거운 관심 속에 히트를 쳤다.

    곧 의료 전문가들이 바세린의 효능을 발견했고 의사들도 가벼운 화상이나 찰과상에는 바세린을 바르라고 환자들에게 권유했다. 그 외에도 바세린은 기침 감기에 바르던 겨자 고약을 대신하거나, 코의 출혈을 완화시키는 데 쓰였다. 또, 피부나 입술이 틀 때 바르는 약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사실 바세린은 1880년대 내내 가정에서 제일 요긴하고 편리한 물건처럼 여겨졌다.
    바세린이 소개된것은 1859년이다. 당시에는 박테리아가 피부염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아직 발견되지도 않았다. 그때는 몰랐지만바세린은 이 문제에도 효과임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연고가 상처를 덮어서 박테리아가 상처에 침입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의사들은 바세린이 화상으로 물집이 생기는 과정 자체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특별히 어떤 치유 효과를 발휘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오늘날 바세린에는 '확실한 보습제' 라는 라벨이 붙어 있을 뿐이다.

    피부의 가장 소중한 친구

    하지만 이런 한계가 알려진 것은 훗날이었다. 바세린은 널리 쓰였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1912년, 비극적인 뉴욕의 생명보험사화재에서 바세린은 많은 사람들의 화상을 치료했다. 그리고 1942년,보스턴의 코코넛 그로브 나이트클럽 화재 때도 사용되었다. 2차 대전 당시 미 국방성은 바세린 제조 회사에 여타의 유명제약회사와제휴하여 군에서 쓸 수 있는 화상용 패드를 만들라고 요청했다.

    유명한 북극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는 영하 8도에도 얼지 않는 바세린을 북극까지 가져갔다. 반대로 열대 지방에서는 썩거나 상하지않는 바세린이 찰과상이나 곤충에 물린 상처에 가장 효과적인 연고였다. 미국의 가정에서는 가벼운 화상을 위한 구급약으로 부엌의 렌지 위에 항상 바세린을 두고 있다. 새로 엄마가 된 여성들은 기저귀발진을 막는 데 쓰기도 했다. 바세린은 두 말할 나위 없이 “피부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던 것이다.

    바세린은 먹는 약?

    1955년, 체스브로우 사는 1846년 테론 폰드가 세운 폰즈(Pond'sExtract Company)와 합병했다. 월가는 이를 두고 "귀족들의 결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두 가문은 미국에서 100년 동안이나 명망을 떨쳐왔기 때문이다. 체스브로우는 50대 중반에 거의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늑막염을 앓았다. 그는 이때 바세린을 머리부터 발끝까지발라달라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회복되었고 96세까지 장수했다. 1933년 생을 마감하게 될 즈음, 그는 자신이 원기 있게 건강장수한 것이 뛰어난 발명품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몇 년 동안 매일 한 숟가락씩 바세린을 복용해왔다고 털어놨다.

    바세린은 여러 가지로 특이하게 사용되었다. 영화배우들은 눈밑에 가볍게 발라 눈물이 나오도록 자극하기도 했다. 인도에서는 심지어 빵에다 발라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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