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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역사 지식

나는 손오공이다 2023. 11. 27. 15:20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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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울의 봄 역사 지식 알고 보자.

    2023년 11월 22일 개봉한 영화로 지금 엄청난 인기몰이 중인 영화가 있다. 

    바로 "서울의 봄 "이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12 군사반란 사태의 실화를 바탕으로 급박하고 긴박했던 9시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은 역사 지식을 알고 보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봄 포스터

    영화 "서울의 봄" 역사 지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서울의 봄"의 주요 요지는 다음과 같다.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기 전의 큰 사건으로 박정희대통령이 살해된다. "남산의 부장들"이 박정희대통령 살해 관련 실화영화이니 서울의 봄 보러가기전에 보고 가면 더 이해가 잘 될 것같다. 박정희대통령 살해 이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을 맡고 있던 정승화간에 사건 수사와 군 인사문제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 결국 전두환은 정승화를 무력화하기 위해 노태우가 있었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를 이용하여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을 1212사태라고 하는데 이후 전두환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하나회"중심의 신군부와 함께 빠르게 정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된다. 

     

    서울의 봄은 1212사태의 이야기만 담은 영화이지만 "서울의 봄" 시기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죽으면서 1980년 5월 17일 전국에 비상게엄령이 확대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박정희대통령 살해사건의 전말

    박정희대통령은 1960년대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석유파동 등 대외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1970년대 점차적으로 경제 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거기에 박정희대통령의 장기 집권에 민주화요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1979년 10월에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박정희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여 진압하였지만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는 이러한 상황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거기에 박정희대통령의 최측근인 경호실장 차지철의 행동도 마음에 들지않아하고 있었다.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는 박정희대통령과 차지철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 두사람을 살해하게 된다. 이 사건을 "10·26 사태"라고 한다. 김재규는 법정꺄지 가게되고 사형을 선고받고 죽게된다. 

     

     

    서울의 봄 1212사태

     

    1.1212사태의 발단

     

    박정희대통령이 사망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간에 사건수사와 군 인사 문제 (수경사령관)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은 정승화의 세력을 무너트리고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 주장하며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이었다는 등의 죄명을 씌워 정승화를 강제현행하는 계획을 세운다. 

     

     

    2.1212사태의 전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1군단장 황영시,수도군단장 차규헌,9사단장 노태우 등 유명인사들이 있었던 사조직 '하나회'는 11월 중순에모임을 가지고 되고 12월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게 된다. 거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20사단장 박준병,1공수여단장 박희도,3공수여단장 최세창.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고 12월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한다. 

     

    당시 정승화 측근이었던 특전사령관 정병주,수경사령관 장태완,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고 연회도중 정승화의 연행 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수도권 인근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켰고 신군부는 전방을 지키던 노태우의 9사단으로 대처하였고 결국 신군부는 정병주와 장태완까지 체포하는데 성공하며 반란 진압군은 무력화되었다.

     

    이와같은 일련의 사태 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는 최규하에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국방장관의 동의가 있어야한다며 계속 거절당하였지만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대통령의 정승화 연행의 재가를 얻게 된다. 결국 최규하는 13일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사후 승인하게 된다. 

     

    3.1212사태의 결과

    군사반란이 성공하자 신군부는 빠르게 정권을 장악하여 전두환은 대장,중앙정보부장,대통령까지 하게 되고 노태우역시 대장,내무부장관을 거쳐 대통령까지 하게 된다. 이 밖에 군사반란에 가담한 신군부 인원들도 요직을 차지하게 된고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된다. 

     

    또한 12·12 군사반란의 성공으로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고 민주헌정을 중지시키고 권력을 유지하려하였다. 이에 많은 국민과 정치인들의 저항 운동이 펼쳐지게 된다. 1980년5월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그 결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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