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또 다른 소금의 탄생
1818년, 다니엘 더들리 에이브리는 루이지애나 남부의 버밀리온강 근처에 있는 암염(岩鹽)산 꼭대기의 넓은 땅을 매입했다. 그리고39년이 흘러 에이브리의 딸이 메릴랜드 출신의 대식가 에드먼드 맥리니와 결혼했다. 이 젊은 부부는 남북전쟁의 와중에도 섬의 소금생산을 관리했다. 1863년 북군을 피해 텍사스로 잠시 피신했던 그들은전쟁이 끝나자 되돌아왔다. 그들이 일궈온 소금 사업은 깡그리 폐허로 변해 있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억센 야채 품종 하나 뿐이었다.
그런데 이 멕시코산 붉은 고추는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더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 녀석으로 소스나 만들어볼까? 맥리니는'이 맛이다' 싶을 때까지 잘 익은 고추에다 소금과 포도식초를 여러비율로 배합하며 실험해보았다. 잘 버무린 재료는 한달 간의 숙성을거친 다음 깨끗이 걸러서 병목이 좁은 붉은 병에 옮겨담았다. 그리고 병에 코르크를 마개를 씌우고 초록색 왁스에 살짝 담궈 밀봉을했다. 드디어 에이브리 섬 특산인 이 소스가 시판되기 시작했다. 그는 소스의 유서깊은 뿌리에 대한 기념으로, 고추의 원산지인 멕시코의 도시 타바스코를 소스의 이름으로 정했다.
웃기는 타바스코 오페라
남북전쟁이 끝난 뒤 남부는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음식은 양도 적고 맛도 없었다. 타바스코는 그런 음식이나마 풍미를 한껏주던 귀중한 소스였다. 1868년 무렵에는 루이지애나 주에서 너무 인기를 얻어 “맥리니가 만든 유명한 소스" 라고 불릴 정도였다. 맥리니는 전직이 은행원이라 돈 냄새를 맡는 데는 귀신이었다. 판매를 확대해야겠구만.' 1869년, 그는 소스 350병을 동부지역의 유수한도매업자들에게 보내보았다. 놀랍게도 도매업자로부터 병 당 1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가격에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1870년 소스의 독특한 배합 방법은 특허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레스토랑이나 미식가들의 집에서도 소스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방방곡곡, 식품창고의 문이란 문에는 다 붙은대담한 광고 덕에 밝고 붉은 타바스코 병은 너무나 친숙한 광경이되어버렸다.
1890년 에드먼드 맥리니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가족 소유의 이사업체는 맥리니의 아들 존의 창조적인 리더십 아래 성공을 거듭했다. 존은 흥행극단을 고용하여 전국에서 “웃기는 타바스코 오페라”를 공연했다. 몇 년 후에는 그의 동생 폴이 하버드의 '설익은 푸딩클럽 (Hasty Pudding Club)'에 그 가극을 소개했다. 클럽은 가극을 뮤지컬로 바꿔서 재연할 터이니 타바스코의 이름을 쓰게 해 달라고 요청해왔다. 맥리니는 클럽의 공연에 너무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들을 뉴욕 무대에 서게 했다. 물론, 그 자리에서도 타바스코 소스를 관객들에게 그냥 나눠주었다.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이 터지자, 존은 '테디 루즈벨트의 거친 기병대'로 알려진 최초의 자원 기병대에 입대하여 산 후앙 언덕 전투에 참가했다. 테디 루즈벨트의 첫째 딸 앨리스 루즈벨트가 에이브리 섬을 방문했을 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정중한 파티가 열렸다. 파티장은 소금으로 조각한 테이블과 의자, 롯의 아내의 소금 조각상 등으로 꾸며졌다(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가 신의 분노로 멸망할 때, 돌아보지 말라는 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돌아봤다가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
블러디 메리와 레드 스내퍼
존의 아들, 네드 에이브리 맥리니는 1900년대 초반에 사업을 이어받았다. 그 후 30년 동안 타바스코 소스는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되었다. 벨기에에서는 타르타르 소스를 친 미국식 스테이크 요리에, 이태리 사람들은 파스타를 만들 때 타바스코 소스를 썼다. 북아프리카나 중동, 동남아에서도 타바스코는 인기 만점의 조미료가 되었다.